2017/12/26 14:02

[완전판]JRPG의 고아들 ver 2017 과대망상 에세이

2017년 한 해가 끝나가 돌이켜보니, 한국 정식발매를 기준으로 JRPG라고 불리는 장르의 대작 세 개를 모두 플레이했다. 플래티넘 게임즈와 스퀘어 에닉스가 손을 잡고, 요코 타로가 디렉션을 맡은 <니어 : 오타마타>, 아틀라스가 오랜 연기 끝에 내놓은 <페르소나 5>(일본에선 2016년 발매), 모노리스에서 연말에 닌텐도 스위치로 내놓은 <제노블레이드2> 총 세 작품이다. 아직 <제노블레이드2>가 중반부에 겨우 진입한 것도 있는데다가, 이 셋을 각자 리뷰하는 것보다도 셋의 내러티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을 언급하는 편이 재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공통항이란, 이 세 JRPG의 주동인물들이 어린아이들 그것도 고아(孤兒)라는 사실이었다.


*이 글에서는 세 작품 모두를 네타바레/스포일러하고 있다. 세 작품을 플레이 중이거나 플레이하지 않은 분은 열람에 주의를 바란다.


물론, JRPG는 오타쿠 컬쳐의 범위 안에 있으며, 오타쿠 컬쳐가 주로 10대를 대상으로 한 주브나일/영 어덜트 픽션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소년소녀인 점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소년소녀가 극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 부모 세대를 극에서 배제하곤 한다는 클리셰는 세간에서도 종종 이야기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면들을 단지 작가편의적인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과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글에서 시도하고 싶은 발상이다. 어떠한 정치적인 무의식인가, 그것은 바로 태평양 전쟁의 패전이후 ‘전후일본’이라고 불리는 상황이다.


특히 패배한 쪽에서 전후를 어떻게 인식하여 살아갈 것인가, 하는 건 문화적으로 커다란 테마가 되기 마련인 거죠. 미국에선 베트남 전쟁 이후에 역시 영화가 바뀌었지요. 어떤 시기까지는 전후라는 것을 끊임없이 테마로 해서, 일본의 전후는 어떤 것이었나. 지금 이대로의 상태가 좋은가. 꽤나 여러가지 형태로, 진지한 세계뿐만 아니라. 제가 애니메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무렵엔, 대부분의 주인공이 고아이거나 편부모이거나 했던 거죠, 어째선지. 지금이 되서야, 아 역시 전후란 걸 마지막까지 질질 끌었던 희귀한 장르였구나. 실은 애니메이션은 마지막까지 끌고갔었다. 어쩌면 지금도 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 피터 발칸 x 오시이 마모루 “무대 <철인 28호>의 뒷면


앞의 링크는 학원물에서 부모가 부재한 상황을 그리기 위해서라고 지적되지만, 그들의 품에서 떠나 여행을 떠나는 작품이라면 부모가 부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은하철도 999>나, <미래소년 코난>, <기동전사 건담> 같은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어른들이 나오더라도 고아가 주인공인 경우는 오타쿠 컬쳐의 초기에도 왕왕 있었다. 부모없는 고아들, 그것은 달리 말해 그들이 따라해야 할 모델이나 규범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야 할 모델이나 규범 — 보편율이 없는 상황, 따라서 그에 근거한 공동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 ‘전후’를 상징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한 영화 감독의 전후 회고담을 들어보자.


그때 걷던 길가의 정경을 잊을 수 없다. 집에서 기누타 촬영소까지 가는 동안 내가 목격한 상가의 모습은 일본인 모두가 정말로 죽을 각오를 한 듯이 비장한 분기였다. 심지어 일본도를 가지고 나와 칼을 뽑아든 채 칼날을 노려보고 있는 가게 주인도 있었다. 조칙은 분명 패배선언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 일본은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하지만 패전 조칙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상가 사람들 모두가 축제 날처럼 신나는 표정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태평양 전쟁 때까지 멸사봉공의 이름 아래에서 자아를 버리고 행동하는 것을 ‘보편율’로 여기고 살았던 전전일본(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유연성. 하지만 그러한 보편율은 패전을 통해서 한 번 폐기되었으며, 따라서 자아의 설립이라는 과제가 전후일본(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영재의 학술논문 <국민의 경계, 신체의 경계>에서는 영화 <라쇼몽>이 바로 그러한 보편율을 새로이 설립하기 위한 문제의식 하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살인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을 그리는 있는 이 작품은, 영화의 바깥 액자에서 그 진술들을 들어보는 ‘절’이 인트로에서는 파편적으로 비춰진다. 심지어 그 ‘절’은 폐허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원작소설 <덤불숲>에는 없는 장면을 추가하여, 스님이 고아 아이를 거두면서 ‘절’의 전체상이 드러나게 된다. 즉, 보편율이 깨어지고 공동체가 해체되어 각자의 진실들만 남은 상황을 뛰어넘을 방법을, 이 스님의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전체 샷을 통해서 <라쇼몽>은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위의 논의를 따라 고아라는 상징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고아들은 부모라고 하는 보편율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에 근거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전후일본이라는 상황 아래에서, 자아의 설립이라는 과제를 갖게 된 일본(인)들의 모습과 상동하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보편율을 설립하고, 그러한 자아들이 모인 (지금은 없기에) 도래할 공동체를 상정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빌둥스로망이나 혹은 영웅설화와 같은 형상으로 나타났다. 위에서 언급한 <은하철도 999>(1977), <미래소년 코난>(1978), <기동전사 건담>(1979)은 모두 1970년대 말에 시작했으며, 모두 고아였던 아이들이 세계를 모험하고 역경을 해쳐나가면서(영웅설화), 나름대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빌둥스로망)을 그려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전까지는 전반적으로 통용되었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불안한 빌둥스로망의 90년대 모델과 <제노블레이드 2>

2017년 연말에 발매된 <제노블레이드2>는 바로 이러한 빌둥스로망/영웅설화와 같은 모델을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고아 소년인 ‘렉스’가 ‘하늘의 성배’인 블레이드 소녀 ‘호무라’와 만나, 갈등이 없는 곳이라고 전설을 통해 내려오는 ‘낙원’을 찾아가는 얘기(‘보이 미츠 걸’)이다. 이 모험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데, 어쨌거나 이들은 각각 나뉘어진 대륙 사이를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각각의 대륙들은, 각각의 규범 아래에 각각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다 — 즉 <라쇼몽>의 진술들처럼 파편화되어 있다. 이들을 횡단하여, 다양한 출신의 동료들을 모아 ‘파티’를 형성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외부(갈등이 없는 곳)인 ‘낙원’에 도달한다는 줄거리는, 우리의 논의에서는 마치 영화 <라쇼몽>의 라스트와 유사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인물의 슈제트적인 움직임, 즉 사건은 그가 모델 공간의 경계를 돌파할 때 발생한다. 경계의 횡단을 가져오지 않는 슈제트 변화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 유리 로트만, 『기호계 : 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


이 작품이 위에서 언급한 초기작들과 구별되는 점은 ‘자원고갈’의 문제다. <제노블레이드2>의 세계는 운해(雲海) 위인 아르스트에 있으며, 사람들은 거대한 고래나 거북이처럼 생긴 거대한 동물인 아르스의 등 위를 대륙으로 삼아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제노블레이드2> 초반 시점에서 이 아르스들은 점점 소멸해가는 상황에 놓여있다. 렉스가 언급하는 ‘낙원’ 역시도 아르스가 소멸해가는 상황 속에서, 자원 때문에 곤란할 일이 없기 때문에 갈등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이것은 70년대말, 80년대 초의 분위기보다는 더 암울한 것으로 필자는 90년대 일본의 상황과 맞물려있지 않나 제시해본다. 90년대는 80년대말의 버블이 꺼지고, 세기말의 분위기와 함께 위축되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움진리교가 있었다. 오움진리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 끝도 없기에, 여기서는 그것은 이러한 불안한 상황속에서 ‘자아를 버리는’, 종교적인 규범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반동적 움직임이었다고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신이 없는 사회에서 공동체가 붕괴할 때 우리는 ‘빛나는 공동체’의 환상에 놀아나고 공백이 된 양심의 장소에 ‘가짜 아버지’에 의해 ‘좋은 것’을 이식하게 된다. ‘끝없는 일상’을 견디기 어려워 ‘빛나는 아마겟돈’을 몽상하고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몽상을 현실화’하려고 한다.
— 미야다이 신지, 『끝없는 일상을 살아라 — 오움교 완전 극복 매뉴얼』


90년대의 작품들이 ‘고대문명의 진실’이 현상황의 타개책이 되지 못한다거나 파괴적인 병기일 뿐(예시:<이상한 바다의 나디아> 등)으로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즉, 보편율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종래의 구도 내로 편입되고 만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노블레이드 2> 역시 중반부까지밖에 하지 않았지만, ‘낙원’이 영 의심쩍은 것으로 암시되는 부분 또한 이러한 90년대적인 모델을 충실히 따르는 작품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말해둘 부분은 히로인의 취급이다. ‘소년과 소녀의 만남’, 그러니까 ‘보이 밋츠 걸’에서 주어는 ‘보이’다. ‘보이 미츠 걸’은 ‘걸’에게 그 얼마나 신기한 힘이 있든 강한 힘이 있든, ‘보이’ 쪽의 성장서사이며 여기에는 당연히 가부장제의 그림자가 깔려있다. 여기서 ‘걸’은 때때로 ‘잡혀간 공주님’이 되어 ‘보이’의 구원을 기다린다. ‘걸’의 힘은 주체적인 의지를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욕망의 대상이다.


반-성장의 00년대 모델, 세카이계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되면서 종래의 90년대 모델들을 밀어내고 00년대에는 전혀 새로운 모델이 제시된다. 그것이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내러티브로부터 분기한 ‘세카이계’ 작품들이다. ‘세카이계’는 정의부터가 매우 불분명한데, 제일 널리 통용되는 것은 “ “주인공(나)과 히로인(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관계성(너와 나)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 부분을 두지 않고, ‘세계セカイ의 위기’, ‘이 세계セカイ의 마지막’과 같은 추상적이면서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는 스토리”라는 것으로 대표적인 작품에 <최종병기 그녀>, <별의 목소리>,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미래소년 코난>이든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이든, 실은 세카이계가 아니어도 오타쿠 컬쳐에서 ‘너(주인공)와 나(히로인)의 이야기’가 ‘세계의 이야기’와 직결되는 경우는 꽤나 많이 있었다. 여기서 중간항이 없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필자는 이미 세카이계를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분기한 이야기로 보았는데, 이는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에지마 사토시의 관점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마에지마 사토시는 세카이계에 있어서 전쟁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이유에서 특이한 형태임을 지적한다. 하나는 ‘화이트 베이스의 부재’로 지칭되는, 전쟁 수행을 위한 기지나 캠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적의 부재’로 감정이입을 거부하는 형태로 그 동기를 잘 알 수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야기 구조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모델로 삼은 작품이 <울트라맨>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즉, 기지를 중심으로 한 ‘아군’이 있고 그곳에 ‘적’이 습격하며 ‘히어로’가 레슬링과 같은 전투를 통해 ‘적’을 해치운다는 구조가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여기에 자신만의 조미료를 한 가지 더 첨가한다. 거의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관객들은 도무지 이 ‘적’인 사도(使徒)들이 어째서 지구를 침략하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후반부의 전개나 극장판을 통해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밝히고는 있지만, 이를 모델로 삼고 발전한 세카이계에서는 마지막까지 적의 정체나 침략의 이유가 수수께끼인 경우가 많다. “이유도 모른 채 적의 침략에 방어만 급급한 상황”, 그것이 세카이계에서 전투(‘적의 부재’)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90년대 모델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바로 모험이나 이동이 제거된다는 점이다. 여러 출신지의 동료들은커녕, 바로 그러한 출신지인 대륙들조차 그려지고 있지 않다. 모험을 통해 주인공이 성장한다는 것은, 기존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황에 내던져지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웅설화적으로는 ‘시련’에 해당하는 부분인 셈이다. 이 ‘시련’을 통해서 영웅은 ‘자격’을 증명한다. 우리의 논의에 따르자면 그는 새로운 ‘보편율’을 발견하고 자아를 설립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도래시키는 것으로써 그의 ‘영웅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세카이계’에서 주인공은 적들과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상황’으로 내던져지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분명히 ‘거대로봇’이나 ‘괴수’나 ‘전투미소녀’와 같은 비일상을 마주하게 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이 본래 있던 장소에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학교생활을 하게 된다(‘화이트 베이스의 부재’). 세카이계는 비일상으로써 전쟁과 주인공의 일상 간의 그 괴리감을 부조리로까지 발전시키며, 전쟁 속에서 “방어만 급급한 상황”의 반복은 부조리함을 더 증대시킨다. 마에지마 사토시는 동서에서, 한신 아와지 대지진이나 오움진리교 같은 거대한 사회 문제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과는 괴리된 채 평범하게 학창생활을 보낸 자신의 체험이 이런 상황들과 닮아있었음을 토로한다.


이러한 괴리감이 리얼리티로써 존재한 이유는, 미사일 단 한 발로도 종말이 찾아올 수 있다는 핵전쟁의 공포는 그대로 이용되지만(모든 것을 끝내는 <최종병기>), 정작 특정한 사상을 바탕으로 두 세력이 다투는 냉전구도는 붕괴했다는(어딘가 멀리에 있는 <그녀>) 90년대의 과도기적 상황과 맞물려 있을 터이다. 일본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일시적이로나마 사상적 공동(空洞)상태에 놓였고, 그 때엔 위기가 닥치더라도 ‘적’이라는 뚜렷한 얼굴을 하기보다는,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는“재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전쟁의 형태나 질서를 ‘역사교과서 속’이나 ‘픽션 속’에서만 보아온 세대의 청소년이라면, 그런 새로운 위기상황을 해석할 틀도 없었으며 더욱이 자신의 ‘반경 5m 이내의’ 현실과 결부짓기 힘들 었을 것이다.


강한 히어로가 아니라 약한 주체에게 동일화하고 싶다는 조금은 기묘한 욕망을 『이리야』등의 작품의 독자에게서 지적할 수 있다. 세계의 전체상을파악하지 못하고 협소한 인식 안에 틀어박혀 있는 주체, 또는 여자아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약한 주체에게 동일화하고 싶다는 욕망, 또는 그런 자신을 누군가에게 부정당하며 반성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 마에지마 사토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마에지마 사토시의 지적과 같이, 작품 속에서 이러한 현실과의 괴리감 — 부조리함 — 그에 대한 자각(반성)이란 고리는 내면묘사나 자의식을 중심으로하는 문예운동처럼 된다. 그리고 그 자의식은 패배감이라는 정서에 지배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보이 미츠 걸’의 장르가 ‘보이’가 ‘걸’을 구하는 상황이었다면, 여기서는 ‘걸’을 ‘구할 수 없다(불가능하다)’는 패배감이 짙게 깔려 있다. 즉, 분명히 주변 상황은 무언가 계속 변화하는데, 주인공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이 세카이계를 지탱한다.


우리의 논의에 따르면 ‘도래할 공동체’도 ‘보편율’도 거기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마에지마 사토시가 ‘세계설정’이라고 부른 것보다도, 이 글이 보기에는 ‘화이트 베이스의 부재’가 중간항의 결여(=‘파티’의 결여)인 셈이다. 더 정확히는, 앞으로 형성되어갈 ‘화이트 베이스’와 같은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기에 너와 나의 이야기가 ‘공동체’의 형성따윈 없이, 그대로 세계의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00년대의 세카이계 주인공들이 ‘화이트 베이스’같은 기지를 대신으로 살아가는 ‘일상’이 도회가 아니라 ‘시골’로 잡고 있다는 점이다. ‘시골’의 한적한 풍경은, 어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이 도회가 아니라 지방이라는 점과 세카이계의 지배적인 정서인 패배감과 결부시켜보면 ‘정치적 무의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냉전 이후, 버블경제 이후에 아직은 뚜렷한 상이 없는 상태에서 ‘세카이계’는 다시 한 번 ‘전후’와 같은 상황을 맞아들였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사상적 공동(空洞)뿐이었다. 동시에 이 공동(空洞)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도회와는 달리, ‘때묻지 않은 것’으로써 노스탤지어를 갖는 전원적 풍경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90년대 상황에서 전원(‘시골’)의 풍경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90년대부터 이어져온 경제성장의 저하로 지방에 있던 이들이 ‘도회’로 상경하여 성공하는 이야기가 점점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세카이계의 패배감과 ‘지방’은 찰떡 궁합이었다.이들은 그렇기에 반-성장 서사이다. 어른이 되는 성장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기 보다는,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며 그러한 ‘비일상’이니 ‘모험’이니 하는 것들에서 납득할만한 설득력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도회를 중심으로 발달한 일본에서 더는 ‘이동’을 통해서 어떠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질된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때묻지 않은’ 상태로 — 절절한 러브스토리(순애)의 주인공들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90년대 모델들과 달리, ‘세카이계’에서는 믿을만한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지방의 청소년들에게 성공한 어른들은 이미 ‘지방’을 떠났기에, 그 반대로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패배한 어른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90년대 애니메이션에서는 부모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사상을 실천하는 ‘어른 캐릭터’가 등장하는 반면에 ‘세카이계’에서는 그러한 어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단지 실패한 어른일 뿐만 아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겐도나 카츠라기 미사토처럼 겉으로는 어른처럼 행동해도 그 실상은 어린아이처럼 우둔한 모습으로 그려지며, 이들에게서 모범이 될만한 보편율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 세계에는 어른 따윈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보편율’도 ‘도래할 공동체’도, 설립해야할 자아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카이계’가 실존주의와 사이가 좋은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세카이계의 아종으로써 <니어 : 오토마타>

<니어 : 오토마타>는 그러한 점에서 00년대 ‘세카이계’ 작품들과 한없이 닮아있다. 닮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것에서부터 발전한 모델에 가깝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카이계의 냉전구조와 달리, 이 작품에서는 <최종병기>도 없고, 적의 형태도 뚜렷하다. 더 정확히 말해서, 적인 ‘기계생명체’는 주인공 ‘안드로이드’와 인형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세카이계가 역사가 없는 공동 위에서 재난과 같은 전쟁을 반복한다면, <니어 : 오토마타>는 역사가 의미를 잃고 형해화되어버린 폐허 위에서 대리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먼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세카이계의 괴리감과는 달리 <니어 : 오타마타>의 주인공들은 전쟁의 한 가운데에 놓이고 있다(물론 마에지마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라이트노벨 『이리야』와 같은 그 세카이계적 구조에도 비판적 논리를 지니는 작품으로써 세카이계라고 부를 순 있을 것이다).


<제노블레이드2>가 멸망에 점점 돌입해가는 세계를 바탕으로 함에도, 웅장한 도시나 활기찬 마을을 보여주는 반면에, <니어 : 오토마타>는 거의 모든 필드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폐허이다. 분명히 게임적으로는 새로운 스테이지가 열리고 거기에서 모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고 있는 ‘세카이계’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제노블레이드 2>처럼 ‘대륙’을 횡단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더해서 새로운 스테이지가 개방되는 것은 <니어 : 오토마타>의 1부뿐이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적’인 기계생명체 만들어낸 새로운 모델을 쓰러뜨린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2회차, 3회차를 거듭해도 계속해서 이미 개방된 필드에서 싸움이 이루어지며 ‘최종목적지’로의 ‘횡단’이나 ‘이동’은 생겨나진 않는다.


더 나아가 3부에 해당하는 3회차에서부터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와, 에일리언의 침공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생명체들 간의 싸움이 무의미함이 밝혀진다. 둘 다 지켜야할 창조주 — 인류와 에일리언이 이미 오래전에 멸종했데도 불구하고 무의미한 대리전쟁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렇기에 그들은 둘 다 고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멈춘다거나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주인공인 소년인 9S는 소녀 2B를 구하지 못하며, 그들의 의미를 근거짓는 인류를 상실한다. 그러한 ‘자아를 버리는’ ‘사명’으로부터 벗어나 나름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평화롭게 공존해보고자 하는 기계생명체 파스칼은 3회차에서 철저하게 패배한다(그는 비교적 노인처럼 말한다). 소년 9S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무의미함을 견디지 못하고 ‘빛나는 아마겟돈’을 고집하는 어린아이인 채로 죽는다.


물론 세카이계의 정석적인 모델과는 달리, 2B는 ‘욕망의 대상’으로써 힘의 소유자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2B와 9S는 일개 병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 둘의 이야기가 이미 끝났음에도 — 2B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니어 : 오토마타>의 세계는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것은 사상적 공동(空洞)에서 자신의 입장만이 절대화하는 듯한 세카이계의 모델(‘너와 나의 이야기’=‘세계의 위기’)과는 달리 이들 역시도 그 ‘세카이’ 안에서 철저히 상대화되었음을 나타낸다. 더해서, 마지막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 일발역전, 세계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아직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반전을 <니어 : 오토마타>가 마련해두고는 있다. 여기서 그 반전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너무나 길어지기 때문에, 이 반전이 ‘역사의 형해화’ 위에서 다시금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아내려는 시도(‘공동체’의 모색)란 점만을 얘기해두자. 그러나, 이 작품에도 부조리함과 패배감의 정서가 깊게 깔려있으며 실존주의와 친근하단 점에서는, ‘세카이계’의 모델에서 발전한 아종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2010년대, 도회의 자경단 모델과 <페르소나 5>

이런 00년대 모델을 지난 뒤의 2010년대의 모델들은 어떨까? 그것의 한 형태를 제공하는 것이 <페르소나 5>이다. <페르소나 5>에서는 ‘도쿄’를 배경으로 하여, 사회신문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노골적인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학교에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성희롱을 하는 체육교사라던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꾼이라던가, 혹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악덕기업의 사장이라던가 하는 사람들이 각각의 던젼의 주인, ‘보스’를 맡고 있다.


이 안에서 주인공을 고아로 볼 수 있을까는 의문이지만, 확실한 건 주인공의 부모가 작중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그가 동료로 삼는 많은 인물들이 편부모 가정이거나 고아로써 묘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아들은 분명히 ‘존경할만한 어른’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나마 가장 이들의 편이 되어주는 이는 주인공의 보호관찰자인 사쿠라 소지로 정도인데, 그는 작중에서 이미 실패한 어른으로 이야기 초반에 주인공을 귀찮게 여긴다던가, 역으로 주동인물들의 ‘파티’인 마음의 괴도단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 마음의 괴도단은 위에서 언급한 ‘보스’들이 지닌 마음 속의 던젼 ‘팰리스’에 들어가, 그들의 어떤 욕망을 해치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페르소나 5에서 반복되는 구조이다.


<페르소나 5>를 지배하고 있는 판타지는 ‘나쁜 어른들을 개심시키자’란 정의의 관철이다. 여기서 주인공들은<페르소나 5>내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도쿄를 벗어나 여러 대륙을 돌아보는 정도는 아니란 점에서 분명히 <제노블레이드 2>와는 다르다. 그들은 서사는 서양의 ‘자경단’, 일본식 표현으론 ‘크라임 파이터’에 가깝다. 이러한 ‘자경단’들은 바로 ‘일상’ 안에서 ‘적’을 발견한다. 이는 멀리 있는 적과의 ‘최종적인 결전’과 같은 양상이 아니라, 일상 중에 평범히 마주친 사람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테러전의 양상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동시에 익명으로 활동하며 법을 어기고 자신의 정의를 관철한다는 점(=사상범이란 점)에서는 오히려 ‘카운터 테러’에 가깝다. 마음의 괴도단도,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언제 어디서 갑자기 게릴라전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위험한 테러집단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페르소나 5>에는 지금 여기와는 다른 상태에 놓인 ‘외부’인 ‘낙원’으로 나아간다는 동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묻지 않은’ 것들이 아니라 욕망이 소용돌이 치는 도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니어 : 오토마타>의 폐허나 세카이계의 시골과도 다른 배경이다. 그렇기에, ‘외부’를 상정하지 않는 절망감에도 패배감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어떻게든 변화를 일으켜보려고 하는 노력쪽으로 기울어진다. 나중에 이 ‘나쁜 어른들’이 대안우파로 연결되는— 말하자면 ‘강한 일본’을 지향하여 ‘자아를 버리는’ 사상으로 회귀하는 수상후보가 게임의 ‘보스’로써 등장하는 것은, 정치적 무의식이 의식의 위치까지 찢고 올라온 것처럼도 보인다.


또한 ‘성배’의 형상화에 있어서도 <제노블레이드 2>와 <페르소나 5>는 흥미로운 차이점을 보인다. <제노블레이드 2>는 위에서도 말했듯 ‘하늘의 성배’가 소녀 호무라로 상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소망을 이루어지는 어떠한 절대적인 대상으로써 ‘소녀’가 상정되어 있는 셈이다. 이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는 것이 위에서 말한 ‘가부장제’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페르소나 5>에서 ‘성배’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이뤄주는 ‘성배’야말로 ‘진정한 최종보스’로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경단’이 항상 갖고 있는 문제이지만, 만약 이들이 모든 문제를 초법적인 방법으로 해결해버린다면 사람들이 스스로 변화하거나 새로운 ‘보편율’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다. 더 나아가 <페르소나 5>의 마음의 괴도단처럼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여태까지 조력자처럼 보였던 ‘성배’는 이것을 지적해온다. 고아인 그들 나름대로 쌓아온 ‘보편율’ — 어린아이들을 괴롭히는 어른들을 처벌하고 개심시켜 정의를 행하는다는 방식은, ‘자아를 버리는’ 전전일본의 규범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성배의 형상 때문에 <페르소나 5>에서는 ‘구해야할 히로인’ 소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양상의 피억압자들이 등장하며, 분명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연애를 즐기는 부분도 있지만, 그들도 던젼의 중반부 쯤에서 ‘파티의 일원’이 되면서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00년대의 패배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각성시키는, ‘격렬한 분노’가 이 작품의 지배적인 정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때로는 주동인물들이 그 ‘나쁜 어른들’을 향해서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뱉을 정도의 격렬함인데, 그들은 바로 그 분노를 에너지원으로 하여 정의를 세우고, 새로운 자아(페르소나)를 획득하여, 나름대로의 이전까지의 자신에서 벗어나 성장해 나간다. 그럼에도 그 분노를 동기로 하여 ‘고독한 싸움’을 반복하는 어떤 반동인물, <페르소나 5>의 인트로부터 제시되는 마음의 괴도단 내부의 밀고자와는 또 다르다. 이러한 분노조차도 정의라는 ‘보편율’ 안에 포함하고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것이 마음의 괴도단으로 제시된다. 그렇기에 마음의 괴도단에서 비롯한 이 ‘도래할 공동체’의 범위는 최종 결판에서 극적으로 넓어진다.


오시이 마모루가 말한 것처럼, 애니메 혹은 오타컬쳐는 마지막까지 ‘전후’를 끌고 있었다면, 이는 ‘자아를 버리는’ 전전의 모델을 경계하고, ‘일본이란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 혹은 설립해야 할 자아인 ‘일본인’의 자기동일성에 대해 그들이 무의식적으로나마 질문해왔다는 뜻이다. 위에서 80년대의 모델(<기동전사 건담>, <미래소년 코난>), 90년대의 모델(<이상한 바다의 나디아>, <제노블레이드2>), 00년대의 모델(<최종병기 그녀>, <니어 : 오타마타>), 10년대의 모델(<페르소나5>)로 나눈 이유는, 그것이 전공투 투쟁이 융성했던 60년대 이후에도, 시대에 따라 형태를 바꿔가면서 ‘고아’라는 표상을 통해 질문해온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미 ‘전후’는 전공투와 함께 끝났으며 자본주의의 승리로 역사가 종언되었다는 — 그러니까 어떠한 ‘보편율’은 이제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는 사고방식과 그들은 반대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의적인 분류를 부정하듯이, 이 세 모델이 각각의 작품을 형태로 2010년의 끝자락에 동시에 나타났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어쩌면 아베 정권을 바탕으로 하는 ‘자아를 버리는’ 규범이 다시금 등장하고 있는 지금에, 그 ‘정치적 무의식’이 일본의 크리에이터들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속삭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