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1 07:14

<이 세상의 한 구석에> - 일상으로써 전쟁을 살아간다는 것

"패전에 의해 잃어버리는 것은 인명이나 국토뿐만이 아니야. 재건을 아무리 중첩하더라도 그것만으론 절대로 낫거나 복구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정의, 아니 츠게가 말하던 모럴이려나."
"어떻게 부르든 똑같아. 잃어버린 정의는 돌아오기는커녕, 그들은 정의라는 짐을 벗어던지고 그 입장을 강조해 왔어. 패배자란 역할을 연기해온 거야"
"그 '그들'이란 건 대체 누구입니까?"
"나나, 당신이 지켜야 할 자들. 이 마을의 주민들이야. 자신은 피해자라는 특권을 휘둘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무책임하고 애통한 목소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곤, 정의라는 말이 갖어야 할 엄숙함은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어"

- 영화 <TNG패트레이버 : 수도결전> 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어디까지가 스포일러이고, 어디까지가 스포일러가 아닌지 애매한 경계선에 놓여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해보죠. 1920년대 즈음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그림을 좋아하며 약간 멍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 "우라노 스즈"가 1944년에 18세를 맞이하여 쿠레에 있는 "호죠 가"에 시집을 가서 생활하며, 종국에는 1945년 8월 15일을 맞이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 장소와 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은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여 쿠레는 폭격에 시달릴 것이고, 히로시마는 핵폭탄을 맞을 것이며, 대일본제국은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중에 가장자리에 표기되곤 하는 연표는, 실은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입니다.단,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전투에 참여하는 장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미시사나 풍속사를 보는 듯한 필치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전히 — 그리고 당연히 비극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카운트 다운의 0가 지나고 나서도 영화의 시간이 흐른다는 점입니다.

저는 본래 영화에서 타이틀이 뜨기까지 인트로를 매우 중요시하는 성격입니다. 장기간 반복해서 상영하는 TV드라마라면 좀 늘어지거나 해도 괜찮겠습니다. 하지만 2시간이 평균적인 상영시간으로 여겨지는 영화는 단판승부에서 가까우며, 따라서 영화는 첫 시퀀스부터 테마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앞으로의 전개를 암시하는 등 허투로 쓰여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경우, 첫 인트로가 그러한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지나치게 담담하게 배경이나 인물을 소개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첫인상은 별로였습니다. "원작은 연재 만화였으니까 그래도 좋지만, 영화가 이래도 되는가? 너무 원작을 그대로 옮긴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러나 다 보고 나서, 그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일상으로써 전쟁"을 살아가는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담담한 일상 장면이 반드시 선행되어 제시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장르로써 '일상물'이라는 말을 일컬을 때, 이는 '비일상'이란 대립어 없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대체로 홈드라마 작품을 가리킨다면, 이 '비일상'에는 축제라던가 모험이라던가 마법이라던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안에는 일반적으로 체험하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는 '전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문단에서 쓰인 표현은 "일상으로써 비일상"이 될 텐데, 이 모순된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대개 '전쟁'이라고 하면 전선 위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생각합니다. 반면 우리의 일상 - 자고 먹고 입는 생활하는 그러한 시간들을 전쟁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경계선에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총력전 체제 아래에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전투를 겪지 않았다고 해도 전쟁을 경험했고, 동시에 그들의 생활이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의 호죠 스즈의 시점을 통해서 이 영화를 보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흐르는 나레이션은 그녀의 것이며, 이를 테면 처음으로 스즈가 '고사포 사격'을 보고 '붓으로 물감을 툭툭치는' 환상을 떠올리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서도 알 수 있지요. 작품 전체가 따스한 수채화풍인 것은 그러한 스즈를 중심으로 맞춰진 영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스즈 씨는 조금 멍하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매우 '평범'합니다. 결혼식에서 급히 겉옷을 벗어젖히고, 배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효율적인 요리 레시피를 짜내고, 야시장의 말도 안되는 물가를 보며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는 주인공 스즈의 모습은 대단히 친근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상황은 총력전 체제 아래에서 일어난 것이며 - 그곳에 팔리는 것 중엔 분명히 식민지인 대만의 쌀도 팔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호죠 스즈를 궁지에 몰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은 이 작품 내에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건이 존재하기 전에도, 이미 호죠 스즈의 생활엔 조금씩 전쟁이 침투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호죠 스즈나 주변인물의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애가 병기인 군함을 천진난만 하게 외워보이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가 "(공습)경보는 이제 질렸다"고 투정하는 것으로 변할 때 즈음엔 어쩔까요. 심지어 그 '평범한' 스즈 씨도 "결전복"이니 "대일본제국의 함"이니, "여자의 장기인 죽창"이니 하는 프로파간다적인 언어를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요리 레시피로 밥상이 변합니다. 나중에는 방공호 속으로 밥상 자체가 이동하지요. 그러한 사소한 변화들이 분명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스즈 씨나 주변인물들이 이를 당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이 변했음을 폭격이라는 '충격'이 여전히 증언합니다. 이 충격은 경보를 통해서 예상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익숙해질 수 있는 부류의 것은 아니며, 작중 후반에 갈수록 잦아지는 빈도로 인해 관격 역시 노이로제를 일으킬 지경입니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팅도 매우 우수하지만,  폭격이나 전투기가 내는 위협적인 '충격'의 효과를 재현하는 사운드 때문이라도 영화관에서 볼 것을 권할 정도입니다.

그러한 일상에도 당연히 비극은 찾아옵니다. 히로시마에는 핵이 떨어집니다. 그러고도 전쟁은 얼마간 이어집니다. 8월 15일 패전선언 - 이른바 옥음방송이 끝나고 나서 호죠 스즈가 분통을 터뜨리는데, 이 장면 이후에 원작에서 대사를 변경시킨 시퀀스가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의 판단이나 재현이 매우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또한 통일성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스즈'라는 여성 캐릭터의 시점에서 풍속사나 미시사와 같은 필치로 이야기가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피해자로써 일본인'이라던가, 혹은 '오로지 국가에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머무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미시적 위치에서 느끼는 책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 이 부분은 스포일러라 생각하여 가림처리했습니다. 드래그를 통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호죠 스즈에게 8.15 패배선언 - 옥음방송은 당연히 쇼크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서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써 근거가 되는 사상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 한 명이라도 빠짐없이 싸우자고 하는 절대적인 명령, 비극을 정당화하던 명령이 멋대로 철회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것이 잘못되었는가. 그녀는 "바깥에서 온 것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는데, 이것은 일본인적 순수성을 지켰으면 이겼으리라는 의미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작중에 야시장에서 일부러 대만 쌀이라는 소재를 드러낸 것, 그리고 그 얘기를 하기 직전에 태극기를 올린 것은 여기서 '바깥'이 '식민지'임을 나타냅니다. (물론 둘 다 원작에 있었습니다만, 이 영화는 매체에 맞춰 각색을 세심하게 한 작품임을 얘기해두고 싶습니다). 즉, 일본의 '정의로운 전쟁'의 그 정의는, 실은 바깥-식민지를 착취하는 것으로 지탱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정의는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은 장면입니다. 스즈가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던 이유"가 사라진 것이지요. 오히려 미시사의 시점에서, 실감으로써 책임이나 거짓된 정의라는 인식은 바로 먹거리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오는 것일 텝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이지요. 책임이나 정의라는 것은 그러한 사소한 것에까지 스며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문단 종료)

따라서 스즈 씨가 '결전복'이니 '죽창'이니 험악한 말을 입에 올리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게 우리들의 싸움이지요'니 하는 말을 꺼내면서 스스로의 생활을 커다란 주어와 동일시하고 있을 때, 이미 거짓된 정의에 대한 배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험악한 소리를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 스즈 씨는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물론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절대로 '정상'과 명확한 경계선을 긋고 나뉘는 게 아닙니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전쟁이 그러하듯이요. 오히려 전쟁이나 이상함은 조금씩 조금씩 일상과 정상을 물들이고, 침투하여, 마침내는 호죠 스즈와 같은 '평범한' 사람마저도 눈치채지 못하게 뒤바뀝니다. 호죠 스즈 씨가 "눈 앞에까지 올 거라던 전쟁인데,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걸까"라고 말하는 있을 때, 이미 사태는 너무나 늦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그 초반부의 '일상'과 후반부의 '일상'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시도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8.15이후를 그려내는 이 작품의 힘은 상당합니다. 지금까지 일상이 그러했듯, 앞으로의 일상도 이어질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게 팍 하고, 종말론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엔 더 이상 "참고 견디게 하는 이유"따위가 없고, 정의는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무근거한 일상이 계속 됩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 - 그리고 호죠 스즈는 그 무근거한 일상을 살아야 하며 새로운 정의를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 이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는 매우 강한 에너지입니다. 그 낙천적인 에너지는, 풍속사와 미시사라는 시점을 유지하기에 도출해낼 수 있는 나름의 윤리이겠지요. 물론, 그렇기 때문에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이를 테면 스즈의 시아버지나 남편은 해군 소속이었으며, 특히나 남편은 군법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고 - 아까도 말했듯이 '생활'과 '전쟁'이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스즈 뿐만 아니라 '일을 나가는' 남편에게도 그러할 것입니다. 아무리 스즈 씨를 중심으로 잡았다고 해도  그 부분이 미비한 것이 역시 아쉬움으로 남긴 합니다.

이 영화는 11월 16일에 개봉하여, 제가 18일에 서울 지역에서 봤는데도 단관상영 중이었습니다. 아마 제 생각 안에는 일주일 안에 막을 내릴 것 같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사운드를 통한 충격을 경험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한 영화이기 때문에, 기회를 내서라도 반드시 영화관에서 볼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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