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1 01:15

백합 넷실러 백과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의 '쇠르' 시스템도 그렇고, 백합이란 장르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자매애라는 게 중요한데, 이것이 연대의 의미에서 완벽한 평행이 아니라 '선후배'와 같은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요즘 생각하는 중입니다.

왜 '같은' 이란 말을 썼냐면 이 관계가 실제로 연상연하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명확히 말하자면, 동경(憧れ, 아코가레)란 감정을 핵으로 작동하는 관계가 아닐까요. '저런 멋진 사람(素敵な人, 스테키나 히토)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소녀와, 바로 '그런 사람'인 다른 소녀와의 관계. 

재미있는 건 이 관계는 언제나 발전을 통해서 뒤집히는데, 그러니까 '실은 나를 바랬던 너가 나를 지탱해주었다'는 식으로 말이죠 . 요약하자면 '기사가 공주를 구한 줄 알았더니, 공주가 기사를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사와 공주' 이야기가, '여기사와 여공주'라는 형식으로 변주되었을까요? 여기엔 두 가지 욕망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두 욕망 다 '남성'의 형상을 배제하고 싶다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가부장적으로 인식되는 '연애'로부터 다른 형태의 '사랑'을 추출하고자 했던 적극적 시도로, 다른 하나는 분신을 없애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이란 자각을 은폐하는 소극적 시도가 아닐까요.

저는 후자가 전자의 파생형이라 보는데,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 등과 같은 백합 장르가 순정만화=소녀만화에서 부터 시작했던 걸 생각하면, 이 남성의 형상을 제거하고자 했던 시도가 반드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이라는 남성 독자를 상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해서 후자는 흔히 말하는 '미소녀 동물원'으로 이어지는 논의이긴 합니다만, 미소녀 동물원이 푹신푹신(ふわふわ、 후와후와)한 갈등 없는 세계란 점을 고려하면, 완전히 동일하다곤 할 수 없습니다. 백합은 좀 더 드라마틱한 장르, 그러니까 감정의 부딪침과 갈등이 큰 장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후... 저 말고 다른 누가 이런 거 엄밀하게 검증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냥 평생 방을 뒹굴며 살고 싶습니다...

ps. 이 기사와 공주의 얘기가 또다른 형식으로 변형되는 건, 공주를 구하려고 했는데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배덕감에서 비롯하는 세카이계가 아닐까 합니다. 가부장제의 중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백합과는 다르게, 가부장제의 모델이 먼저 있고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식의으로

후... 나 말고 누가 이런 거 (이하생략)

덧글

  • 재미소년 2015/11/14 13:34 # 삭제 답글

    유리쿠마 아라시의 백합은 동경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을 이해하는것과 양보하는것을 중점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스미카가 쿠레하의 아저씨 같은 면이나 좋아함을 포기하지 않는면을 인정하고 좋아해주는것과 쿠레하가 긴코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소원을 빌어 결국 파경을 맞이했었던 것을 인정하는 것과 자기 스스로 곰이되는 것을 선택하는것은 양보로도 볼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루루가 미룬에게 가지고 있었던 애증과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쿠레하에게 긴코를 양보하고 그 둘을 이해하려 하는 면은 뭐랄까... 서로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는 것이니까 상하관계라기 보다는 연대에 더욱 가깝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만 긴코가 루루를 구원한(미룬의 꿀을 가져다 준)일은 공주가 기사를 구원한 것과 비슷하게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 당시 루루는 공주님이었기에 조금 상황이 다른것 같아요. 공주를 버리고 기사가 된것이니까요.
  • 늅실러 2015/11/15 01:16 #

    말씀을 글의 편집을 조금 고쳤습니다.

    저는 <유리쿠마 아라시>도 저의 글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구원'을 통한 비대칭적 관계가 있고, 그 다음에 그 관계의 역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하신대로 쿠레하는 긴코를 한 번 '오만하게' 구원합니다. 그리고 긴코는 루루에게 꿀단지를 전해주고요. 즉 여기서 이미 한 번 비대칭의 구조가 발생합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구해준 것이죠. 그리고 다음 단계에 들어서, 긴코는 쿠레하를 다시 한 번 만나서 구하게 되고 루루는 긴코의 기사가 됩니다. 즉 "기사가 공주를 구한 줄 알았더니, 공주가 기사를 구했습니다".

    단, <유리쿠마 아라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첫째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구한다는 발상이 "오만"임을 명시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로는 관계의 전환이 엄청나게 빈번하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부러 스미카는 위의 예시에 넣지 않았는데, 긴코/스미카/쿠레하 셋의 관계와 그 변화는 이 이야기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간략히 정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펭귄드럼에서 사과(생명)의 순환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통해 '연애'로부터 다른 형태의 '사랑'을 추출해내려고 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양보하는 것'에 이를 수 있었겠지요. 물론 모든 백합물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굳이 백합물로 표현한 데에는 그런 노림수도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 인레 2016/06/11 14:24 # 삭제 답글

    백합을 백합으로 만드는 것, 이란 것에 대해 2016년 7월에 글을 쓸 예정입니다. 완성 후 링크 달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 또한 좋은 리퍼런스가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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