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0 00:35

(극장판)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R - 꽃과 꽃의 대격전

극장판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R

꽃과 꽃의 대격전


드래곤은 무엇이냐. 상제가 태고 인민들의 미신적인 받들음을 받아 제위(帝位)에 오르던 제5년에 허공 가운데서 탄생한 일태쌍생(一胎雙生)의 괴물이 었었던 바, 하나는 드래곤이 곧 그것이요, 또 하나는 (…)미리니, 미리나 드래곤이 한자로는 다 용(龍)이라 번역한다. — 신채호, <용과 용의 대격전> 中

신채호가 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은 제목 그대로 두 마리 용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이 용들 중 하나는 “복종을 천직으로 아는” 동양의 미리, 다른 하나는 “<혁명>과 <파괴>의 악희를 즐기는” 서양의 드래곤이다. 이 용들은 파괴와 폭력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말하자면 ‘남성적인 힘’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는 <극장판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R>(이하, 세일러 문 R)을, <용과 용의 대격전>의 제목을 빌려서 “꽃과 꽃의 대격전”이라 부르고 싶다.

용과 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방금 파괴와 폭력적인 힘을 지니는 ‘남성적인 힘’을 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꽃의 힘은 그것과는 좀 다르다. 우리는 꽃, 하면 먼저 그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선명한 색과 은은한 향기로, 꽃은 그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이 꽃은 후에 열매를 맺어 다시 식물을 번창케 한다. 이 아름다움, 생명력과 번창이야말로 꽃의 힘이다. 용의 힘과 대조해서 말하자면 ‘여성적인 힘’일 것이다. 비록 악과 싸운다고 하지만,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분명 용보다는 꽃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꽃과 생명력이란 단어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 위해선 게걸스러울 정도로 양분을 빨아들이고 광합성을 해야만 한다. 식물이라고 해서 생명력을 거져 얻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예외 사례는 아니니까. 그리고 세일러 문 R에 등장하는 적, 키세니안이 바로 그러한 꽃이다.

키세니안은 별과 별의 생물들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키세니안은 식물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대신 자신의 수족이 될 사람의 ‘약한 마음’에 파고 들어 그를 조종하고, 그의 약한 마음을 미움으로 바꾸고 사악한 파워로 바꾼다. 여기서는 “턱시도 가면” 치바 마모루(이하 턱시도 가면)의 어릴 적 친구, 피오레가 바로 그 타겟이다. 치바 마모루로부터 어릴 적에 작별 선물로 꽃을 받아 감동한 피오레는, 바로 이 키세니안을 턱시도 가면에게 바치기로 마음 먹었고 (여기서 겸사겸사 턱시도 가면을 외롭게 만들었던 인류도 멸망시키고), 이를 세일러 전사들이 막고자 하는 것이 세일러 문 R의 큰 줄기다.

그런데 잠깐, 이 묘사는 어쩐지 이상하지 않을까? 분명 적으로 표현되는 키세니안의 ‘꽃’의 속성은 이에 맞서는 주인공인 “세일러 문” 츠키노 우사기(이하 우사기)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사기는 가족을 잃고 ‘약해져 있던 마음’을 가진 턱시도 가면의 곁에 있어주기로 했고, 그에 감응한 턱시도 가면은 우사기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도와주며 우사기에게 헌신한다. 그건 우사기와 함께 하는 다른 세일러 전사들의 경우도 비슷해서, 어쨌거나 ‘약한 마음’을 힘으로 바꾸고, 그리하여 자신을 돕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사기와 키세니안은 다르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에 분명 우사기는 타인의 생명력으로 지구에 돌아온다. 더해서 말하자면, 다른 세일러 전사들과는 달리 어두운 면이 없고 천진난만하다는 점에서,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점에서 분명 우사기는 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주인공 우사기는 같은 꽃인 키세니안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이 꽃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속성을, 키세니안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줄거리를 설명하면서, 턱시도 가면이 피오레에게 꽃을 줬다는 얘기를 했다. 이 장면은 꽤나 중요해서, 세일러 문 R에서 오프닝 정도를 제외하면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을 정도다. 생각해보라. 이 작품에선 가장 처음 부분에서, 작별의 순간 사람이 사람에 꽃을 주었고, 그 꽃을 받은 사람은 십여년이 지나서도 다시 꽃을 바치고 싶어할 정도다.

여기서 세일러 문 R은 흥미로운 순환 구조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꽃을 턱시도 가면에게 준 것은, 바로 어릴 적 우사기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우사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다. 슬퍼하는 턱시도 가면 옆에서, 같이 슬퍼하거나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 “축하해”하는 웃는 얼굴과 함께 우사기는 꽃을 준다. 작품의 클라이막스에서, 꽃의 모양을 한 은수정을 들어올리며 우사기는 지구에 격돌하는 소행성을 막는다.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아무도 홀로 두지 않는 힘을”이라고 외치며 마치 어릴 적 “턱시도 가면” 치바 마모루에게 꽃을 바쳤듯.

그리고 이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은수정의 힘을 다 쓰고 죽을 지경에 처한 우사기에게 피오레는 자신의 ‘생명력’을 꽃의 형태로 바친다. 심지어 그것은 피오레가 우사기에게 직접주는 순환이 아니다. 바로 피오레가 꽃을 바치고 싶어했던 대상인 턱시도 가면을 향해, 피오레는 자신의 생명력을 꽃의 형태로 바친다. 그리고 턱시도 가면은 그 꽃을, 그 생명력을 다시 입으로 우사기에게 옮긴다. 말하자면 생명력의 선순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점은 본작의 감독인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최신작 <돌고도는 펭귄드럼>에서도 동일하다)

우사기가 외치는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 그리고 “아무도 홀로 두지 않는 힘”. 작중에서 우사기는 싸우기를 몇 번이고 망설이는데, 그것은 소중한 누군가가 다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피하고 모두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세일러 문” 츠키노 우사기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력을 빨아들여 ‘피어나는 것으로써 꽃’인 키세니안이 갖지 못한 ‘바치는 것으로써 꽃’의 힘이다. 정확히 말하면 ‘최초로 그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꽃’이며, 바로 그런 꽃으로 “세일러 문” 츠키노 우사기는 존재한다. ‘피어나는 꽃’인 키세니안이 약한 마음을 미움으로 만든다면, ‘바치는 꽃’인 세일러문은 약한 마음을 ‘바치고 싶은 마음’으로 바꾼다. 그것은 꼭 주는 사람 자신이 대상이 아니어도 그렇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후속작 TV 애니메이션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S>을 참조한다면, 바로 그럴 수 있는 자가 구세주, 메시아다.

확실히, 인간이 손에 들 수 있는 궁극은 꽃과 무기라고 생각한다. — 오시이 마모루, <좀비 일기> 中

사람은 누구나 무기가 아니라면 꽃을 손에 든다. 아니 바치기 위해 무언가를 들 때 비로소 그것은 꽃이 된다. <극장판 세일러문 R>에서는 그 메시아조차도, 다른 사람이 ‘바치는 꽃’의 순환에 의해서만 계속 살아갈 수 있음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바치는 꽃’의 빛에 의해 ‘피어나는 꽃’의 폭주가 멈춘다. 메시아의 순간은, 아마 그렇게 도래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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