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2 10:55

투명한 픽션, 투명한 미래 - 퀀텀 패밀리즈 과대망상 아티클

퀀텀 패밀리즈 감상


- 목차 -

I 서론
 1. 들어가기 전에
 2. 투명함이란 무엇인가 

II 본론
 1. 투명함과 픽션 
   1) '투명한' 픽션의 속임수
   2) '투명한' 픽션, 그 다음 

  2. 뇌화 = 사회 = 픽션, 투명함
    1) 뇌화 = 사회
    2) 우리는 뇌화 = 사회 = 픽션 속에 살고 있다.

  3. 반투명한 픽션의 속임수
     1) 시오코의 독법 - 투명한 픽션과의 공모

III 결론


I 서론 
 1.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밝혀 둘 것은, 이 글의 방향성을 스스로도 정하지 못했다는 변명입니다. 저는 분명 쿠라메님과 비하여 지식 수준, 철학에 대한 지식이 적고 따라서 정확한 용어 사용이 아니라 직감적인 용어 사용에 의존할 생각입니다. 이를 테면 '가리타니 고진의 투명함과 같은 것으로~'라는 화법이 아니라, '여기서 투명함이란 예측가능함으로 치환하면 편하다'같은 화법 말입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그런 투박함을 가진 글이 지닌 장점인 쉽게 읽히기를 버릴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갖가지 곳에서 인용할 것이며,  그것을 독자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겠지만, 인용의 수가 많으니 읽기 불편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서술한 내용에 대해서 '나 이 책 안읽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라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요. 한 편으론 지나치게 투박하면서 한 편으론 지나치게 세밀한, 방향성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단점들만 똘똘 뭉친 글이 될 예정이옵니다.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러한 글의 성격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정확한 분석이었는가, 정확한 평가이었는가에 대해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데로 재조합하고 비난했을 뿐 제대로 보지 못한 거 아니냐는 말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아티클이 아니라 에세이 카테고리에 분류하는 것도 그 탓입니다. 이 글의 정확성이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차근차근히 쓸 생각입니다. 투명함이 뭔지, 왜 픽션에서 투명함이 문제가 되었는지, 신체와 투명함은 어떤 관계를 갖는지, 퀀텀패밀리즈는 정말로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 해설답게 반투명했는지 말이지요. 따라서 슬로우 스타터가 될 예정이고 '뭐야? 퀀텀 패밀리즈 얘기는 언제 나오는거야?'라고 생각할 독자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감안해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먼저, 투명함이 무엇인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2. 투명함이란 무엇인가

  먼저 투명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이라는 의미입니다만 트랙백한 글에서 쓰인 말은 (물론 그런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쓰이는 '투명하다'의 어법과 근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불투명하다는 말을 관용적으로 쓰이는 예시를 보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원들이 불투명하다 
  미래가 불투명하다.
  
  도대체 여기서 불투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제 생각에 이 말은 자명하지 않다 - 예측불가능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자원들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는 투자원들이 공개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이 공개되어 있지 않기에 분명치 않고, 분명치 않기에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자명하지도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도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확실치 않은 요소 즉 우연적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하지 않고, 자명하지 않으며, 예측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투명함이란 공개되어 있거나 우연적 요소들이 배제되어 있기에 '자명하고' '예측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투명함에 대해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투명함은 실물적이라기보다는 상상적 - 상상적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다면 인공적 - 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테면 순금 그대로의 상태에서 발견되는 광석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으실 것입니다. 또한 정제수가 자연적인 상태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모두 인간의 손을 거친 뒤에 탄생한 것으로, 실물로 존재하는 순금이나 정제수 또한 100% '투명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순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른바 99%로 불순물이 섞여 있어 어느정도 '불투명'하고, 정제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왜 투명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가, 중요한 키워드는 퀀텀 패밀리즈와 신체성의 관계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다음에 나오는 픽션과 투명함의 관계에서 이어집니다.


II 본론

  1. 투명함과 픽션
 
 "소설이 쓰여지고 읽혀지는 이유는, 인생이 단 한번 뿐이라는 일에 대한 항의라고 생각합니다" - <하늘을 나는 말> 후기.

   1) '투명한 픽션'의 속임수

 이 점에 대해서는 쿠라메님이 지적했으니 간단히 훑도록 하겠습니다. 근대문학은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사생'에 의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즉, 자연을 모방하여 그려낸 그림으로 생각하면 사실주의적인 회화를 염두해두셔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모방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며, '현실 그대로'라고 착각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원근법 적 테크닉은 실제 그대로를 모방한 것이라기엔 결함이 있습니다. 2차원적인 그림을 3차원적으로 착각 시킬 뿐, 분명하게 2차원과 3차원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사진을 상상하면 쉽습니다. 머리가 큰 친구가 조금 뒷편에서 찍히면 2차원의 소실점에 의해 우리는 그 친구 머리가 보통 크기라고 상상하게 됩니다만, 실제로는 그저 큰 머리가 조금 뒤에 (소실점 가까이에)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이를 소설에 적용하면 아무리 작가가 '현실적'으로 쓰려고 한들, 그것은 '그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부분을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작가가 그것이 그러하다고 생각한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청준 작가가 자신의 소설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 '지배와 해방'에서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글을 쓰는 행위를 일기로 시작하며 '좋게 말하면 자기 관심의 내면화 현상'이고 '실인즉 화풀이', '자기 위로 행위'라고 합니다. 편지 역시 현실적인 독자를 구체적으로 전제하지만, '바깥 세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에 실패를 하는 경향이 많은 쪽이기 쉽'기에 쓰여지는 것은 변함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글쓰기에 대한 욕구를 설명합니다.

"(중략) ...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번에는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하여 좇을 수밖에 없도록,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자기 식으로 뒤바꿔놓을 수 있을 어떤 새로운 질서를 꿈꾸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좀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면,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려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즉, 문학과 픽션이란, 현실계에 대한 복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실계와 직접 대면하지 않는 '자기 위로적'인 형태로 말입니다. 이청준씨는 물론 이것만으로 프로의 글이 쓰여질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좀 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이러한 복수심을 은폐한 채 사회적인 책임만을 (사회정의를 위해, 불의를 고발하기 위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내세우는 것은 '엉뚱한  속임수'가 깃들 위험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글쓰기의 욕구가 복수인 이상 '투명한' 픽션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둬야 한다는 점을 이청준 작가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대해 자명한, '투명한' 픽션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그 '투명함'을 근거로 두고 현실에 부합하며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근대문학(의 정치적 역할)은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의견입니다.



2) '투명한' 픽션, 그 다음

  이런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반응은 몇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각 방향성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방향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로는 보수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그려야(그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라는 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쿠라메님이 언급하신 바와 같이 오오츠카 에이지 같은 사람이며, 오오츠카 에이지는 캐릭터(의 신체의) 죽음을 그리기 위해 사지를 절단하고 눈알을 파고 캐릭터를 해부하는 그로테스크한 단계까지 밀어붙이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작 중에서의 캐릭터의 신체의 죽음이며, 캐릭터의 죽음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코제브가 말한 의미없는 일에 집착하는 '스놉'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로는 포기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현실 그게 뭔가요 우걱우걱 나으 타카네쨩은 카와이이하다능'. 현실을 반영하기 자체를 포기하고 미적인 쾌락, 즐거움,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우리가 소위 말하는 뽕빨물이 이러한 계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코제브가 말한 그저 그러한 대로 살아가는 '동물'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번째로 이 둘 다를 거부하거나 혹은 둘을 교묘하게 정합시켜 뛰어넘은(이른바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 패턴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가 주장하는 '반투명한' 문체, '게임적 리얼리즘'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꽤 복잡합니다. 먼저, 게임의 속성을 세이브-로드를 통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포기파'의 전개를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밀어붙입니다. 캐릭터는 '캐릭터로써' 기능하며, 이들이 어떤 사건을 겪어도 - 죽어도 다른 세이브-로드를 통해 다른 평행세계에서 다른 전개가 가능합니다.(=현실적으로 그리는 게 불가능합니다.)  이 '포기파'의 전개, 이야기 안쪽에선 마치 무책임하게 평행세계들을 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나중에 이야기 바깥(슈타인즈 게이트의 리딩 슈타이너와 같은 메타픽션적 요소)에서 수렴되며, 이 이야기 바깥을 보는 것으로 독자 = 플레이어들은 '지금 이 현실'을 인정하는 과정에 도달합니다. 이런 평행세계적인 요소를 탄탄히 구성한 슈타인즈 게이트의 대사를 잠깐 빌려보죠.

  "무수한 세계선에 또 다른 내가 있을지도 몰라. 그 의지가 이어져서 나라는 존재가 있는지도 몰라. 그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키세 크리스) "그곳에는 어떠한 미래도 확정되지 않은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중략) 그곳에서 관측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미래는 관측되는 것으로써 확정되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슈타인즈 게이트의 선택이다."

  즉 무수한 캐릭터들, 무수한 가능성(무수한 세계선)들을 수렴하여(그 의지가 이어진 나) 관측자(플레이어)로 하여금 지금 눈앞의 단 하나뿐인 '이 현실'(=슈타인즈 게이트)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 이야기가 내정해놓은 '투명한' 레일 위를 선택(관측하여 확정)하는 것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불투명한'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이 바로 이 '반투명한' 문체,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분명 퀀텀 패밀리즈는 투명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란 무엇일까요. 그를 알기 위해선 신체성과 뇌화사회를 좀 더 들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2. 뇌화=사회=픽션=투명함


1) 뇌화=사회

  쿠라메님이 지적한 '신체'는 '기계'이다라는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좀 더 복잡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쿠라메님이 말씀하신 정신과 신체를, 뇌와 신체로 치환해 이원론화한 것이 아니냐고 되물은 유뇌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뇌론은 혈관(과 혈액과 심장과 폐)의 기능이 순환이듯, 뇌(와 신경계)의 기능이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유뇌론이 예시로 들고 있는 것이 환상통, 즉 잘려나간 부분에서도 뇌가 착각을 일으켜 간지럼즘이나 고통을 느끼는 증상입니다. 혹은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뇌가 고통을 일부러 차단하여 못느끼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신체부위의 상태와 무관하게 뇌가 기능하는 경우가 있으며, 뇌라는 구조에나 회로에 의해 정신이라는 기능이 작동한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 펜필드의 뇌의 감각지도 사진. 우리는 신체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반응을 조절해 느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뇌와 신체가 분리된다고 본다면 이원론적이지만, 뇌는 정신이라는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구조일 뿐이며 늙고, 병들고, 죽는 신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해부학자로써 그는 구조와 기능을 나누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뇌가 척수와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를 분명하게 나누는 것에 대해서도 의아하다는 식의 서술을 합니다. 물론, 그 다음에 '그게 다 인간이 가진 뇌의 특성때문이다'로 넘어가는 패기로운 결론이 기다리고 있는 게 유뇌론의 재미긴 합니다만.

 정신이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의사나 의지란 무엇인가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뇌가 컴퓨터와 같이 정보처리 기능을 하며, 각 신체부위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극을 받아들이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 반응에 대한 피드백 축적하여 앞으로를 예측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뇌의 기능 곧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정신이 단일체, 하나의 혼이라고 보는 경향에는 반박이 있습니다. 벤자민 리벳의 실험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http://blog.daum.net/hanjeonman/10059406

벤자민 리벳의 실험의 결론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고 인지하기 0.3~0.5초 전에 이미 뇌는 그 행동을 할 채비를 하고 있다'가 됩니다.즉, 동작이 일어나는 가운데 그 중간 지점에서 '움직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처럼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의지 = 정신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이러한 결정을 처리하는 프로세스 전체, 즉 지금 이 순간이라는 인식을 창조해내는 행위 자체가 의식이며 의지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방금 나는 신체가 기계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한 바 있습니다. 신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숨을 불어 넣어주신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신 신성한 무언가가 아니라,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기능하는 수많은 구조라고 볼 때, 그것은 기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뇌 역시 신체의 일종이며, 기계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뇌가 특별히 매우 복잡한 기계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신장의 투석 기능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나 인공심장이 아직 완벽하지 않은 점, 복잡한 얼굴근육을 흉내내기 어려워 언캐니 밸리가 생긴다는 점 등을 살펴 볼 때, 신체의 다른 부위 역시 매우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기계라면, 이러한 예가 가능할 것입니다. 포크레인이 팔의 근육을 거대하게 형상화한 기계이고, 칼이 날카롭게 단련된 주먹이며, 플루트가 변형된 성대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뇌의 기능을 이어받은 - 아웃소싱한 기계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유뇌론이 말하는 뇌화=사회란 바로 그러한 뇌의 기능으로 둘러쌓인 사회를 의미합니다. 아까 의미했던 뇌의 기능을 몇 가지 떠올려 볼까요. 자극의 통합, 우선순위 통제, 반응, 반응에 대한 피드백 축적, 상황의 시뮬레이트. 이런 것들을 행하는 구조란 무엇일까요? 이런 것들을 아웃소싱하여 더 큰 효율을 얻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컴퓨터가 가장 가까운 기계이겠습니다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일테면, 인간의 의식과 자동인형과의 관계를 다룬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합니다.

  "개체가 만들어 낸 것은 또한, 그 개체와 같이 유전자의 표현형이란 말이 생각나는군"
  "그건 비버의 댐이나 거미줄 이야기잖나?"
  "산호충이 만든 산호초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생명의 본질이 유전자로 모여진 정보를 전파하는 것이라면, 사회나 문화 또한 방대한 기억시스템일 뿐이며 
   도시는 거대한 외부기억장치가 되겠지"
 
 - 이노센스의 도시 전경

   이노센스는 즉, 이러한 뇌화 사회의 정체를 바로 도시(구조)이며 사회이며 문화(기억 시스템=기능)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계는 물론 쟁기나 포크레인같은 근육을 대신하고, 안경이나 망원경처럼 감각기관을 돕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판알, 활자매체, 컴퓨터와 같이 뇌(와 신경계)를 돕는 것이기도 합니다. 네, 물론 정신은 신체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체=기계의 확장으로 정신 또한 확장하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뇌의 확장, 변화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뇌가 뇌밖으로 아웃소싱하여 더 큰 효율과 지속을 통해 얻게 될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 이것을 염두해두고 퀀텀패밀리즈 후문에 인용된 유뇌론을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화 과정에서 척추동물은 '뇌화(腦化)'라고 불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략) 이 진화 경향의 결과가 현대의 도시다. 도시에는 뇌의 산물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물, 도로, 가로수, 다양한 실내 설비도 모두 사람의 뇌가 만들어내거나 배치한 것이다. 인공물이 아닌 것은 거기에서 배제된다. 뇌는 오로지 뇌의 산물에 둘러싸여 동화나라에 산다. 거기에 위화감은 없다. 있다면 그것을 배제한다. 위화감은 뇌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뇌의 산물이다. 기시다 슈는 유환론(唯幻論)을 말한다. 사람은 본능이 망가진 동물이다. 그런 상태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본능을 대신할 것으로 환상이 필요하다. 환상은 각 개인 속에 있고, 사회는 그 공통부분을 '공동 환상'으로 빨아 올려 성립한다. 이것은 물론 유뇌론의 일종이라 해도 좋다. 본능은 뇌에 기록된 것이고, 환상도 역시 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중략) 사회는 암묵리에 뇌화를 지향한다. 거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신체성'의 억압이다. (중략) 뇌화=사회가 신체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뇌는 반드시 자신의 신체성에 배신당하기 때문이다. 뇌는 그 발생 모체인 신체 때문에 반드시 망가진다. 그것이 죽음이다. (중략) 뇌화=사회에서 최종적으로 억압되어야 할 것은 신체다.(중략) 그것은 지배와 통제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언급성에서 뇌의 근본적은 모순은 논리가 아니라 그 신체성에 있다. 뇌에 관한 자기 언급성의 모순이 실제의 논리적 표현보다 강하게 의식되는 것은 배후에 뇌의 신체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죽어야 하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뇌다. 그래서 뇌는 통제 가능성을 집약하여 사회를 만들어낸다. 개인은 죽어도 뇌화=사회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유뇌론은 말한다. 세상에는 오직 뇌만이 있거나 (요로 다케시, <유뇌론> 中, 강조는 이 글에 맞게 본인=넷실러가 다시하였습니다.)

 뇌화 = 사회가 하고 있는 것은 신체성의 '배제'나 '제거'가 아닙니다. 뇌는 그 발생모체가 '신체'이고, 그것을 '억압'하거나 '은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유뇌론에서 말하는 뇌가 두려워하는 것은 '신체가 뇌(정신)에서 독립'하는 사태, 즉 '죽음(혹은 뇌사)'입니다. 뇌라는 통제기관을 거치지 않아도 신체는 불완전하게 신진대사를 하고, 이러한 점은 컬트 종교에서 시체가 배설이나 배뇨를 한다고 부활이라고 주장했던 사실이나 뇌사 이후에도 몇가지 조치를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 등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쿠라메님이 말씀하신 '정신이 신체에서 독립한다'는 초월적인 이야기는 유뇌론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  '정신이 신체에서 독립한다'라던가 '정신이 신체에서 초월한다'라는 환상 역시 (뇌라는 신체에서) 만들어진 기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개체가 가진 '신체' = '기계'를 확장하고 변화시키면서 정신은 스스로를 확장하고 변화시켰으며, 그 확장과 변화는 거꾸로 '신체성'의 억압과 은폐를 통해 더욱 더 가속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유뇌론이 보는 '신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능을 작동시키는 구조이며, 실재하는 유물론적인 세계이며, 동시에 우리의 정신의 바깥에서 오는 위화감, 통제불가능성, 혹은 예측불가능성 - 즉 '불투명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뇌화=사회로은폐하려던(투명성) 뇌자체의 신체성(불투명성)을 전면에 내보임으로써 뇌과학적으로 투명한 픽션들을 까발리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유뇌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뇌화 = 사회 = 픽션 속에 살고 있다.

  뇌화 = 사회를 염두해 둔 채, 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현실'이 무엇인지 대해 논해보고 싶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여러분은 자연이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연은 물론 스스로 자 그러할 연으로,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의 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혹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생겨난 산, 강, 바다, 식물, 동물 따위의 존재. 또는 그것들이 이루는 지리적ㆍ지질적 환경. 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직감에 의존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연이란 어떤 이미지입니까.

  혹시 한적한 농가를 떠올리신 분이 있다요? 땡, 유감이지만 틀렸습니다. 농촌은 이미 인간이 주거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비록 많은 제약이 있지만 그곳은 사람에 의해  많은 것들이 변화한 곳입니다. 특히나 과수원의 나무, 재배하고 있는 작물들은 굳이 비닐하우스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교배를 통해서 사람 손에 의해 변형된 것들입니다. 일례로 원시 사과라고 불리우는 사과는 과육이 현재의 그것보다 많지 않고 당도도 낮은 편이라고 합니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사과들은 대부분 인류의 손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케이스입니다.

(일반적Typical 사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난쟁이 사과) - 출처 영어 위키피디아


  그럼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공간은 어떨까요. 남극이나 정글, 사막 같은 곳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왠만한 지역에서 인류는 발견되고 이들은 얼음을 쌓거나 풀을 엮어서 집을 짓고 임시 움막을 세우며 현대사회에서는 큰 도시를 세우기도 합니다. 아직 사람이 개척하지 않은 공간, 우주공간이나 망망대해 정도는 이러한 분류에서 제외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럼 조금 논의를 추상적으로 날려 봅시다. 여러분은 홉스적 자연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홉스적 자연이란 홉스가 이야기한 자연 상태로,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인(Homo homini lupus)' 상태 이른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탐욕적이고 공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이 협동하기 위해서는 이를 제제하기 위한 '정부' = '국가'가 필요하게 되고 그로인해 사회계약을 맺게 된다는 것이 홉스의 주장입니다. 즉 자연적인 불안한 상태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적이고 강력한 존재, '리바이어던' = '국가'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약육강식, 서로 죽고 죽이는 정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홉스가 제시한 자연은 그럴싸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전혀 다른 개체 혹은 전혀 다른 종이 협동하거나 최소한 '휴전'하는 상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개미와 진딧물의 공생관계가 적극적인 협력의 관계라면, 아프리카의 물가에서 목을 축이는 동물들간에는 서로간의 침범을 자제하는 점 등이 소극적인 협력관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의식적이지 않은 차원에서 이뤄지기도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과 그 대장 속에 서식하는 대장균의 경우에는 포유류에게 병을 일으키는 균도 있으나 비타민 K2를 생산하고 박테리아를 막는 공생관계의 균도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실물관계 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테면, 연속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미래가 드리우는 영향력이 충분히 크다는 전제 하에, 작은 무리의 호혜주의(혹은 팃포탯) 개체들에 의해서 협력은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도 있습니다. 거대한 통제 집단이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협력의 진화> 참조)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렇기 때문에 홉스적인 자연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홉스 역시 실제 있던 상황이 아니라 국가 분해된 상태인 것처럼 가정했을 뿐이라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마치 분해된 상태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 즉 인간의 본성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중략) 를 이해하는 것이다"  - 홉스의 <시민론> 中

 다만 그것이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모델링, 즉 픽션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픽션이라고 할지언정 홉스적인 자연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유효타당하게 고려될 만하고 현실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몽상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경제학에서 유명한 수요공급곡선이란 것이 있습니다만, 이 수요 공급곡선이란 기본적으로 '공급자와 수요자가 합리적인 주체일 때'를 가정하고 있습니다.(현시) 하지만 실제로 가격결정은 이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공급자의 경우 담합이나 독점을 행한다거나 수요자의 경우 동물적인 반응으로 합리적인 판단에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요공급곡선이 실물경제적이지 않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경제모델을 파악하기 위한 유효한 모델링이란 것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현실계(적어도 지구 내부)에서 마찰력이 없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만, 뉴튼 역학 등에서 마찰력이 없을 때 물체가 등속직선 운동을 한다는 모델링은, 과학적으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유효한 모델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투쟁상태의 자연이라는 픽션(모델링)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나 '주권'이라는 새로운 픽션(인공적 존재)을 창조하고 또 우리 주변을 픽션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회이며 다시 말해 뇌화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투명한 픽션'의 사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치 그것을 처음부터 있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 혹은 그것이 당연한 결과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의 '민족' 개념에 대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일컬은 베네딕트 엔더슨의 의견이 가장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냉전시대에는 마치 두 국가가 전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 시대도 있습니다. 냉전시대에 쓰여진 SF에 군사부문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대하게 묘사되거나, 소련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부분 등을 보면 이러한 시대상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 모든 것이 픽션이니 무효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천부인권 개념이 픽션이기 때문에 무효다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것은 최소한 '현재로서는' 유효한 픽션으로, 앞으로 깨어질 수도 반대될 수도 있지만 가장 최선(혹은 차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런 뇌화=사회=픽션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들에도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혹은 그러해야 할, 당연하고 '자연적'이고 '투명한' 것은아니란 사실을 말입니다.



3. 반투명한 픽션의 사기 

  1) 시오코의 독법 - 투명한 픽션과의 공모

  나와 쿠라메씨의 의견이 갈리는 지점을 '시오코'라는 시스템을 기계로 보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엔 '시오코'는 그저 잘 기능하는 픽션이고, 그것은 '구조'가 아닙니다. '시오코'의 탄생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컴퓨터의 데이터 베이스라고 하는, 전류의 디지털 신호와 회로에 의해서 구현된 '기능'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쿠라메씨가 유뇌론이 말했던 뇌화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오코는 정확히는 '양자' '컴퓨터'라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패턴이자 '기능'에 불과 합니다. 그것이 유물론적인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은, 뇌가 신체라는 사실에서 변하지 않는 정도의 지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물론적인 세계, 당연하다고 일컬음으로써 생겨나는 것은 '투명한 픽션'에 대한 믿음입니다.

  '제도'나 '시스템' = '픽션'을 '자연'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단순히 쿠라메 씨의 해석일 뿐만 아니라, 퀀텀 패밀리즈가 '시오코'를 다루고 있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이를 테면 주인공인 유키토가 시오코를 거부하기 직전에 떠올렸던 부분은 이와 같습니다.

'나는 다양한 인생을 산다. 어떤 때는 행복한, 어떤 때는 불행한 인생을 산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풍요롭지만, 또한 놀라울 정도로 빈곤한 세계이며, 순열의 종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도 결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필시 그 수학적인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인간은 수학에는 저항할 수 없다. 그리고 저항해도 의미가 없다. 2 곱하기 2는 단연코 4이며, 그것은 도스토옙스키 시대에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유키토가 수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뮬레이션 - 평행세계 내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 말하자면 정해진 상수나 계수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행세계 내에서 발견한 요소들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의 '의지'야 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유키토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뮬레이션은 누가 디자인 했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시오코입니다. 그 시오코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며, 시오코야 말로 언급했듯이, 뇌화=사회=픽션의 실현 그 자체입니다. 시오코의 디자인을, 혹은 시오코 그 자체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의지'를 운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유키토는 시오코를 인정함으로써,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지로 시오코를 부정함으로써, '시오코에 의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죄할 수 있는 투명한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시오코가 정지하여, 유키토의 딸로서 등장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유키토의 '의지'이며, '시오코'가 정지한 세계일까요. 오히려 그 세계야 말로 '시오코'가 의도한 세계이며, 유키토의 행동이나 의지 역시 이러한 시오코에 의해 디자인된 것에 불과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키토는 '시오코'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정 뒤에, 그러한 세계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결과며, 도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결말을 저로서는 순진하다고 밖에 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시 도래한 신이고,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지정해주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테면, 이러한 회화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신이 상실한 처녀성을 회복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신은, 원한다면 처녀의 명예를 회복시켜 다시 흠 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지만 처녀성 자체를 회복시킬 수는 없다고 했어. 처녀성의 상실을 없었던 일로 돌리는 건 신의 속성에 반한다는 거야."

"마도카(神)는 아퀴나스의 신에 가까워. 자비로운 신은 인어공주가 물거품으로 화하기 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소년의 연주를 보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소원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죽음이라는 마법소녀의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어. 그것이 신의 섭리인 거지."

"만약 마도카(神)가 스코투스의 신이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랐을 거야. 스코투스에게 신은 그 자신의 전지성으로 말미암아 태초로부터 미래영겁으로 펼쳐진 신의 섭리로서의 법에 구속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오직 자비할 뿐인 전능한 폭군이었어."

"스코투스는 아퀴나스가 말한 신의 영원한 법 같은 건 믿지 않았어. 살인과 강간이 나쁜 건 신의 속성으로부터 귀결되는 게 아니라 입법자인 신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야. 신이 반대로 명령한다면? 그때부터는 살인과 강간이 신의 영광에 부합하게 되겠지."

"이 우주가 필연적 섭리에 의한 귀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능한 신이 해량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신은, 원한다면, 열역학 제2법칙과 계약의 법리를 초월해서라도 소녀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 설령 그로써 우주를 파괴하는 결과에 이르더라도."

- 출처, twitter.com/snobproof
  
   플레이어에 생기를 불러일으킨다는 반투명한 문체로, 아즈마 히로키가 이르른 곳은 그러한 게임을 디자인하는 '룰러' 혹은 '디자이너'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건 '투명한 픽션'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유키토가 하는 행위, '시오코를 인정하되, 시오코를 부정한다는' 행위(그럼으로써 시오코에 의해 그 의지가 회수되고 속죄하는 결말로 향한다는 <퀀텀 패밀리즈>)는 '전쟁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던 일본 제국주의식의 '결단 없는 결단주의'에 다름아닙니다. 이것은 차라리 '투명한 픽션'보다 더 엉뚱한 속임수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시하는 것은 그런 것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연한 결과(속죄의 결과)로 밖에 향할 수밖에 없는 '투명한 미래'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청준이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퀀텀 패밀리즈 세계를 디자인한 존재, '시오코' 역시도 다름 아닌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에 의해 구현된 존재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2 곱하기 2 식의 수학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복수심'을 감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감춘채 죄와 벌과 도덕의 이야기로 대단원을 내리는 퀀텀 패밀리즈를 과연 도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아니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III 결론

  분명, 퀀텀패밀리즈가 구현하려고 했던 '반투명한 문체'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 자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복수심' 역시 인정하는 동시에  캐릭터가 아닌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실감'으로 주려고 한 시도는 도덕적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뇌화=사회=픽션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 그것 역시 작가의 '복수심'에 의해 꾸며진 반역적인 세계일 수밖에 없는데 - 그것이 과연 '투명한 문체'가 행한 우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뇌화=사회=픽션이라면, 그것에 대항할 만한 '픽션'역시 존재하리란 사실입니다. 이 '픽션'에 대하여 이청준 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작가가 그의 이념적 세계 지배의 수단으로서 어떤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그것을 확대해 나간다는 것은 그것으로 그가 이전에 없었던 세계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온 세계에 대한 새 시선의 발견이나, 있어온 세계에 대한 자유라는 새로운 질서의 부여행위를 뜻할 터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계 밖에 또 다른 세계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오기는 했으되 우리 삶과는 무관하게 망각되어 온 세계, 또는 우리 사람을 부당하게 배반해 온 그릇된 질서로 존재해 온 부정적 세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새로운 삶의 질서를 부여하고 확대해 나감으로써 우리 삶의 새로운 터전으로 값있게 편입해 들이는 작업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터전을 더욱 넓게 확대해 나감으로써, 보다 많은 삶의 자유를 누리고, 그것을 더욱더 넓은 가능의 세계로 화창하게 해방시켜 나가는 작업인 것입니다.'
- 이청준, <지배와 해방> 中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위해 작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토 케이카쿠의 MGS 시리즈에 대한 평으로 이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우리들을,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를 큰 단위로 규정하는 틀. 커다란 이야기는 죽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걸 코지마 감독은 알고 있다. 커다란 이야기는 아직 그곳에 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을 규정하고 쥐도새도 모르는 사이 우리들을 투쟁과 파멸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

 신은 죽었다,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코지마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지배하는 신이다. 빅보스라는 한 남자의 기괴로운 변모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그 시대상의 신의 디테일이다.

(중략)

  그러니 여러분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우리들의 시대를 지배하는 신의 디테일을. 우리들을 속박하는 존재가 우리들을 어디로 이끌어갈 것인지를. 적어도 코지마 감독은 두려워 하지 않았다. 소련의 소멸과 그것이 일어난 해를 정확히 맞췄다 해도, 자신이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의 배경이 뉴욕에서 현실로 되었다고 해도. 무언가를 예고하는 것. 그것은 신을 숭배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가리킬 수 있는 몇 안되는 깨어있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다.
 
  우리들이 그저 깨어있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은 될 거다. 그러니 우리들도 두려워하지 말고 가리키자. 우리들의 세상의 신을.

  코지마 감독의 아이들인 우리들의 의무이다.

  이제 우리들도 가리키자.'

- 이토케이카쿠, <코지마 히데오 - 신이 없는 시대에 존재하는 신을 말하는 이야기꾼으로서 -> 

덧글

  • 늅실러 2013/02/12 19:02 # 답글

    2013 년 2월 12일 11시 10분,수정완료. 이제 더는 수정될 일 없음.


    추가 : Homo hominis lupus 가 정확한 표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추가2 : 글에는 아티클에 넣을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정작 등록할 땐 아무 생각 없이 긴글이네? 하고 냅다 아티클에 박았음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리얼 겸손을떨러면 제대로 하던가 이게 머야 병신ㅋㅋㅋㅋㅋㅋㅋ
  • kurame 2013/02/14 19:10 # 답글

    음... 공교롭게도 제 생일날 올라온 글이네요. 생일선물 감사드립니다(...) 두근두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뭐랄까 님과 저의 논리전개과정에서의 차이라고 할까, 세세하게 드러나는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체'에 대한 저와 다른 정의방식이라든가, '시오코'를 읽는 방식이라든가 하는 것이었네요. 일단 시오코를 읽는 제 독해가 시오코를 대하는 유키토의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밖에요. 사실 저 감상글을 쓰면서 최대한 작가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상상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 kurame 2013/02/14 20:02 # 답글

    여러가지 차이점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님과 저의 독해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시오코에 대해서일 겁니다. 님은 시오코를 뇌화적 픽션이라고 말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시오코는 시스템=기계(의 기능)로 읽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신체는 아니라고 하십니다만(왜냐하면 신체란 예측 가능함으로서 성립하는 픽션이라고 할수는 없기 때문에) , 솔직히 저로서는 아즈마 또한 여기까지도 의식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요.
    아즈마는 시오코(=일반의지)를 픽션으로 결코 보지 않습니다. 그가 일반의지 2.0에서 누차 강조하는 바는 그것이 <물질>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전까지 일반의지를 <픽션>으로서 논해왔던 전 철학자들(칸트, 헤겔 등)의 독해가 낡았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일반의지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베이스라는 것 자체가 이미 님이 말하시는 것 같은 신체의 예측 불가능적인 요소들까지도 일률적으로 통합병렬하고 있는 시스템으로서 우리들이 이미 일정부분 경험까지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가 일반의지를 통해 보다 완전한 제도의 성립을 꿈꾸는 까닭은, 일반의지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베이스가 종래 예측 불가능했기때문에 <뇌화>하여 제도화 할 수 없었던, 님이 말하는 뉘앙스의 <신체>적인 것들까지도(바꿔말하면 <무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까지도) 데이터베이스는 기록,보존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때문에 시오코는 아즈마에게 있어서 (님이 지적하신 점들까지 포함해서도) 신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데이터베이스>와 <일반의지>라는 것은 <뇌화사회>라는 예측 가능함만으로 이루어진 자폐성을 뛰어넘어 예측 불가능성을 물질화하는 것이기에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아즈마를 비판하는 것은 곤혹스럽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인용하신 이토 케이카쿠의 글은 제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아즈마에 대한 옹호로 읽힙니다.

    "우리들을,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를 큰 단위로 규정하는 틀. 커다란 이야기는 죽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걸 코지마 감독은 알고 있다. 커다란 이야기는 아직 그곳에 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을 규정하고 쥐도새도 모르는 사이 우리들을 투쟁과 파멸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 신은 죽었다,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코지마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지배하는 신이다. "

    여기서 신을 일반의지로 읽는다면 이게 바로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우리들의 시대를 지배하는 신의 디테일을. 우리들을 속박하는 존재가 우리들을 어디로 이끌어갈 것인지를. (...) 무언가를 예고하는 것. 그것은 신을 숭배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가리킬 수 있는 몇 안되는 깨어있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다.
    우리들이 그저 깨어있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은 될 거다. 그러니 우리들도 두려워하지 말고 가리키자. 우리들의 세상의 신을."

    대책없이 우리를 쥐도새도모르게 속박하는 존재(예를들어 일반의지, 시오코)를 숭배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가리키는 것. 사실 유키토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토 케이카쿠에 대해서는 학살기관 말고는 잘 모릅니다만, 저에게 있어서 이 글은 완전히 아즈마적이네요.
  • kurame 2013/02/14 20:18 #

    또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님이 말하는 <뇌화사회적인 것>=<도시(구조)>라는 것은 "시에는 뇌의 산물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물, 도로, 가로수, 다양한 실내 설비도 모두 사람의 뇌가 만들어내거나 배치한 것이다. 인공물이 아닌 것은 거기에서 배제된다." 이런 것인데,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같은 도시공학자가 생각해낸 개념이 <패턴 언어>라는 것으로 도시수요자들의 <무의식>을 패턴화하여 <뇌>에서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도시가 아니라, 말하자면 <신체>적인, 동물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단지 욕구하는 것을 총합하여 그것으로서 아키텍쳐를 만들어내자는 것이 나옵니다. 이 이론은 일본에서는 <아키텍쳐파>라는 학문적인 흐름으로까지 이어지고, 이 흐름에 자신의 데이터베이스론으로 주도적인 의견을 만들어나간 것도 아즈마 히로키였죠... 적어도 확실한 것은, 아즈마가 이런 흐름(뇌화 사회적인 것에의 거부로서 생겨난 흐름들)에 무지했을 리가 없고, 그에 대한 나름의 생각으로 자신의 이론을 개진했다는 점은 확실하다는 겁니다... 이러니까 제가 아즈마를 비판하는 것이 난감한 거죠.
  • 늅실러 2013/02/14 20:16 #

    글쎄요,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여기서는 일반의지를 읽은 다음에 작성을 시작했는데도 일반의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일반의지 2.0이 가시화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예측 불가능성'=무의식이거든요. 유뇌론식으로 말하면 말할때마다 뇌가 활성화되는 부위를 눈 앞에다 들이밀어서, 신체성을 각인 시키자는 식의 의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 아직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다 읽지 못했고, 또 이 호모 사케르 2 예외상태또한 읽지 못했습니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도 저는 꽤 깨름직합니다. 이를 테면 퀀텀 패밀리즈나 프랙탈에 나오는 '정보기록생활자'(자신의 모든 기록을 보내서 수당을 타내는 부류...) 부분이, 실현가능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누가봐도 생명을 국가에 기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생정치나 수용소적인 상태, 이에 따른 데이터 베이스의 검열(구글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구글은 지금도 개인정보가져간다고 존나 까이고 있습니다)에 의한 침해나 '학살이나 파멸상태'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현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입을 딱 닫고 함구하고 있단 느낌입니다. 이를 테면 그래서 국가는 데이터 베이스를 관리하는 존재가 될 거고, 국가의 많은 부분은 민간에 이향될 것이라면서 얘기하면서도 정작 PMC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를 안하고 있어요. (전에도 말씀드린 적있지만 국민국가의 마지막 퍼즐은 상비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튼 이 부분은 저 역시 정리가 되지 않아서 정확히 말씀드리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시오코의 해석을 최대한 단순화했던 것이지요. '시오코'라는 존재가 이끄는 방향이 도덕적인 죄-속죄 결말이라는 점, 그리고 어쨌거나 해피엔딩을 예감시킨다는 점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자신의 그러한 '투명한 픽션'에 대해 자각적이지 못하거나, 혹은, 철저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시오코가 처음부터 죄를 '없던 것'으로 돌려 버렸다면 저는 이러한 해석을 내놓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 늅실러 2013/02/14 20:20 #

    철저하지 못했다...가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예를 들면 학살기관의 마지막 씬에서는, 일기 데이터베이스로 어머니의 일생을 뽑아내고, '그런 어머니의 시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존 셰퍼드의 죄책감을 무화시켜버립니다. 여기서 존 셰퍼드는 허무감을 느껴버린 뒤 리바이어던을 전복시켜버리는데, 그러면서도 중간에 '학살문법'에 의해서 감염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저 허무감을 풀어버리는 극단적인 비극인 것이지요. 같은 세계관인 하모니에서도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핵전쟁상태로 돌입했다고 서술되는데, 이는 존 셰퍼드가 모르고 한 일이 아니라 서술 내에서 '은폐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만큼 퀀텀패밀리즈는 시오코의 존재에 대해서 극적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내놓을 수 있는 해석은 이렇게밖에 될 수 없고요.
  • kurame 2013/02/14 20:25 #

    저는 뭐랄까, 그 도덕적인 죄-속죄 결말이라고 할까, 해피엔딩적인 부분이 일종의 아이러니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터라... 아즈마가 자각적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지적하신 1984적인 상태, 국가에 의한 통제라고 할까 사생활침해의 문제라고 할까에 대해서 아즈마도 생각 안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군대 가기전에 아즈마의 정보환경논집 좀 읽다가 군대에 왔는데, 거기서 그도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긴 하죠.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 kurame 2013/02/14 20:29 #

    그런 극단성은 뭐랄까, 아즈마같은 비겁자(......)한테는 바랄 수 없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당장 일반의지 2.0에서만 해도 혁명적인 뉘앙스의 주장을 해 놓고는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느니 기존체제도 좋은점이 있다느니 다 같이 가야한다느니 이런 식으로 끝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봤을때 퀀텀 패밀리즈가 비철저하다면 그건 아즈마가 비겁(.....)하기 때문입니다.
  • kurame 2013/02/14 20:30 #

    근데 님 딴건 그렇다치고 트위터 어떻게 되신 거임?
  • 늅실러 2013/02/14 20:30 #

    분명 시오코가 해피엔딩을 부르는 부분은 문체적으로도 감동으로 끓어오르는 부분이라기보다 굉장히 섬뜩한 느낌으로 적혀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무자각이라고 보기엔 저도 좀...; 어쩌면 그는 활자매체라는 형식이 장황함이란 장점을 갖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일부러 그러한 열려있는 엔딩을 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니들이 생각해봐라 란 식으로?)

    그리고 그래서 말씀드렸지만 일반의지 2.0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논의 내에서는 일부러 좀 거칠게 퀀텀 패밀리즈를 읽은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의지 2.0 읽고 나면 이거 존나 잘 깔 줄 알았는데 더 수수께끼가 되었음 ㅡㅡ;

    아, 트위터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결국은 이런 글을 쓰기 위해 폭파시켰다고 보면 됩니다. 트위터 폭파시키고 나니까 쉽게 완성되었음(...) 트위터라는 매체가 워낙 짧고 간결한 글(그러다보니 깊이 있지 못한;)을 요구하는데, 트위터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좀 더 길고 깊이있는 글은 못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폭파시켰습니다. 동기는 그게 아니긴 했습니다만;
  • 늅실러 2013/02/14 20:32 # 답글

    http://www.yes24.com/24/Goods/8380522

    -> 그래서 일반의지 2.0에 대해선 이거 주문하면 알 수 있을까 생각중(...)
    외쳐 아즈마 히로키 개새끼! 난 호구새끼!
  • kurame 2013/02/15 20:00 #

    뜬금없지만 원서는 역시 교보문고가...(...)
    아즈마 히로키 개새끼! 난 호구새끼!! 아즈마는 욕하면서도 보게 되는 맛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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